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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의 ‘양요당 팔경’, 그 현장을 찾다

입력 : 2017-06-14 16:00:00
수정 : 0000-00-00 00:00:00

 
성호 이익의 ‘양요당 팔경’, 그 현장을 찾다
 
‘경관과 역사’가 파주시민이 지켜야할 자산 

▲ 양요당 위치라 추정되는 곳에서 북한땅이 보인다.


▲ 구글지도에 표시한 양요당의 위치 : 이익이 남긴 양요당팔경시로 추정한 양요당의 위치이다. 따라서 유적 발굴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



▲ 오두산과 교하(자료: KBS 한국사기, ‘하나를 위하여 문무왕의 꿈’ 사진 캡처. 방영일: 2017. 3. 19.): 오두산과 검단산 그리고 한강, 임진강, 조강이 자연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의 역사적 경관적 가치
지난달 말에 본지의 ‘내 고장 역사교실’ 필자이자 역사교육전문가이신 정헌호 선생님께서 제보 전화를 보내왔다.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는 자연 경관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조선 후기의 대표 실학자 성호 이익이 자연 경치를 팔경으로 읊은 시를 발굴했다는 것이다. 본지에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정 선생님과 미팅을 가졌다. 성호 이익이 남긴 팔경시를 읽어 보니, 현재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의 자연환경을 묘사한 것이었다. 시의 내용이 감각적이고 묘사한 자연환경이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정밀하였다. 정 선생님과 협의하여 특별취재팀을 꾸리고 현장 답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특별취재팀은 정 선생님과 함께 6월 2과 3일 양일에 걸쳐 현장 답사를 진행하고 토론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스토리텔러식으로 정리하였다.
 
교하에 사는 오씨가 양요당을 짓다
18세기 초반 교하 오두산과 검단산 사이(지금의 탄현면 성동리)에 오씨 성을 가진 인물이 살고 있었다. 오씨는 오두산 자락의 경치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이름을 ‘양요당(兩樂堂)’이라고 이름하였다. 양요당이라는 이름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따온 것이다. 즉, 산과 물의 두 가지 경치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양요당에서는 넘실대는 임진강과 한강을 감상할 수 있었고, 우뚝하게 솟아 있는 오두산과 검단산의 즐거움까지 만끽할 수 있었다. 오씨는 자신이 지은 양요당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자 했다. 아버지께서 교하현감이라는 벼슬을 했지만 돌아가시고 안계신 상태였다. 그래서 이름난 학자에게 양요당의 서문을 부탁하고자 했다.

▲ 양요당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수풀이 우거져 남쪽을 볼 수 없기에 검단산에 올라서 남쪽의 심학산을 찍었다. 심학산 앞의 한강을 건너 멀리 보이는 곳이 김포의 봉상산(봉성산)이다.


오씨가 이익에게 양요당의 서문을 부탁하다 
오씨는 이름난 학자인 성호 이익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고, 이익의 종질손 아무개와도 알고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익의 종질손을 통해서 이익에게 ‘양요당’의 서문을 부탁하였다. 이익의 종질손은 광주 첨성리(지금의 안산)에 거주하고 있는 이익을 찾아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대부님, 교하에 살고 있는 저의 지인이 집을 멋지게 지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거기에서 바라보는 산수가 기가 막힙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서 낙조를 보면 하늘빛과 물빛이 감탄을 자아냅니다. …… 검단산의 새벽 종소리가 맑고 고와서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지요. 대부님께서 서문을 지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즉답을 피한 이익은 며칠 뒤에 종질손에게 ‘양요당서(兩樂堂序)’을 써 주었고, 종질손은 양요당 서문을 양요당의 주인에게 전해 주었다. 


 
▲ 성호이익의 초상

이익이 양요당팔경을 짓다
양요당 서문을 받아든 오씨는 문장이 매우 아름다워서 감탄하였다. 오씨는 더욱 욕심이 나서 이익에게 직접 손 편지를 썼다.
“예전에 내 선친께서 교하를 다스릴 적에 능허대(凌虛臺)를 마련했는데, 앞으로는 우뚝 솟은 절벽이 있고 멀리 내와 벌판을 조망할 수 있어서 그 뛰어난 경관이 손꼽을 만하였습니다. 거의 60년의 세월이 흘러 대(臺)가 오래되어 황폐하였으므로 다시 몇 칸의 집을 지었는데, 실로 대를 기반으로 하여 당(堂)을 만든 것입니다. 능허대라는 이름을 바꾸어 양요당이라고 지었으니, 그 이름은 비록 다르지만 그 일은 선조의 일을 계승한 것입니다.……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어서 반드시 기록을 해야 하므로, 선생께서 기문을 써 줄 수 있겠습니까?” 
편지를 받아든 이익은 오씨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며, ‘양요당팔경(兩樂堂八景)’고 ‘양요당팔경기(兩樂堂八景記)’을 써서 보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은 교하의 양요당과 관련하여 ‘양요당서’, ‘양요당팔경’, ‘양요당팔경기’라는 세 편의 글을 남겼다.




    ▲ 일러스트 노은경 


양요당은 어디였을까?
본지 특별취재반과 동행한 정헌호 선생님께서는 양요당팔경시과 양요당팔경기(兩樂堂八景記)에 나타난 지리 정보를 종합하여 양요당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양요당의 위치는 오두산과 가깝되 오두산은 아니고, 남쪽 멀리 김포의 봉상산을 볼 수 있고, 검단산의 봉수를 볼 수 있고, 검단사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고, 농사 짓는 청교를 볼 수 있고, 임진강 하류를 볼 수 있고, 청교 멀리 심악산을 볼 수 있고,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해문을 살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오늘날 심학산이 심악산이다)
특별취재반은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양요당이 자리했을 법한 곳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오두산 자락의 풀숲을 헤쳐 나갔다. 오랫동안 군인들이 점유했던 곳이라서 길의 흔적은 있었다. 참호가 이리저리로 파여 있어서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양요당터로 추정되는 위치는 군사시설인 벙커가 자리하고 있었다. 약 2m가량 땅이 깊숙이 파여 있어서 주춧돌 같은 것은 아예 찾을 수 없었다. 수풀이 우거져 앞이 보이지 않았으나 겨울이었으면 시야 확보가 더욱 좋았을 것이다. 나뭇가지들과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먼 경치를 통해 이익이 묘사한 팔경의 경치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는 있었다. 군인들이 파 놓은 벙커 시설을 통해 6경과 8경은 정확히 확인하였다.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의 모습
역사 교육 전문가인 정헌호 선생의 제보로 시작된 우리 팀의 양요당 관련 자료와 현장 답사의 결실은 또 다른 파주의 명소 발견이라 할 수 있을만한 성과였다.
비록 지금은 이 전의 명성은 사라지고 대신 역사적으로 피치 못 할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지만, 양요兩樂라 불리울 만치 수려했던 그 산과 그 강은 수 백 년 시간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지키고 있었다. 그 자리가 좋다 하여 함부로 파헤치지 아니한 우리 선조들의 자연과 상생하는 자세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시간이었다.
오래전부터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는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체계적이면서도 장기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한 개발에 산과 들, 하천이 마구 파헤쳐졌다. 그럼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가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살펴보며 또한 아직도 진행되는 난개발의 현장도 면밀히 살펴 보기로 한다.

통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설립한 오두산 통일전망대(1992년 9월 8일), 실향민들의 묘지로 조성된 동화경모공원(1995년 7월 20일), 예술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지은 헤이리 예술마을(1998년), 축구 국가 대표들의 훈련 장소인 트레이닝 센터(2001년 11월 9일), 영어교육을 강화한다면 설립한 경기영어마을 파주캠프(2006년 4월 3일), 일명 프로방스로 불리는 파주맛고을 음식문화거리(2007년), 고려시대 국왕들과 공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고려통일대전(2007년 8월 30일), 수입 명품 판매점으로 일명 첼시라고도 불리는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2011년 3월 18일) 등 다양한 시설이 들어서 있다. 또한, 설립 취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러브호텔 단지도 들어서 있고, 10년 동안 표류하고 있는 대림산업의 파주 파크빌리지(콘도미니엄)는 흉물 그 자체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설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콘셉트가 무엇인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마구잡이로 개발했다는 생각뿐이다. 

▲ 양요당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바라본 임진강 하구의 해포


경관도 자산, 역사적 배경과 자연경관 살려야
여기에 더하여 파주시에서는 검단산의 동쪽 끝자락에 장단콩웰빙마루를 조성하겠다고 나섰다. 천연기념물 제324호인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는 바로 그곳이다. 성동리 마을 주민인 조민숙씨는 “장단콩이 탄현에 들어오는 것은 뜬금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장단콩의 상품 가치를 더 높이려면 장단에 설치하면 될 일입니다.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어서 개발이 중단되었던 곳을 개발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스럽습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양요당팔경을 발굴한 정헌호씨의 경우 “양요당팔경은 대한민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경치이며, 더구나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팔경시를 지었으므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자연경관을 살려서 파주 발전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의견을 내기도 했다.

37번 국도로 잘려나간 화석정의 아픔 되새기며
실제로 파주는 뼈아픈 개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화석정과 임진나루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문산에서 적성으로 향하는 37번 국도를 개통했다. 그에 따라 화석정이 있는 적벽의 자연환경을 훼손했을 뿐 아니라, 역사•문화적 가치마저도 훼손하고 말았다.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는 자연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장단콩웰빙마루가 들어서는 산봉우리는 주봉산으로서 그 옛날 교하 고을을 한눈에 볼 수 있던 곳이다. 마을의 역사성과 자연 경관성을 검토도하지 않고 개발하면 파주시가 또다시 후회할 수도 있다. 장단콩웰빙마루를 조성하는 행위가 무분별한 개발이 아닌지 화석정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현재 파주시는 경기도에 오두산과 검단산 일대를 관광특구로 지정 신청을 해 놓은 상태이다. 파주시민이 풍요롭게 살도록 정책을 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 경관이나 생태적 측면은 물론 역사성과 마을의 유래까지도 면밀하게 고려하는 신중한 모습을 기대해 본다.
               

 
특별취재부
 
▲ 양요당팔경완전체

#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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